Trace, 1997
 

박홍천전
9.26~10.9 샘터화랑

김선정, 1997
 

현대인의 일상은 그 속도가 매일매일 빨라지고 있다. 간혹 너무나 빠르게 지나가는 일상 속에서 예전의 ‘속도-종종 느렸음-‘를 찾으려고는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프레임이라는 요소가 만들어 주는 공간과 함께 시간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진도 현대인의 일상만큼이나 빨라지고 있는 매체이다. 하지만 박홍천은 긴 노출로 느리게 작업을 하는 사진가이다. 그래서인지 광주비엔날레의 <권력전>에 포함되어 있는 그의 작품 <앨리스에게>는 물리적인 작업 형태만 보면 ‘속도’라는 주제에 더 어울리는 듯도 하다.

<앨리스에게>는 놀이동산을 의도적인 긴 노출로 찍은 것으로 그의 사진 속에는 이 때문에, 움직이는 것들은 다 사라지고 움직임이 없는 것들만이 남아있게 된다. 그 긴 노출시간 동안 오히려 빛은 계속 변화하며 움직인다. 이 움직이는 빛은 N.D.(Neutral Density) 필터의 작용과 함께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 속에 놓여진 것 같은 미묘한 청색의 색조를 만들어 내며, 화면을 어둡고 무겁게 누른다.

그에게 있어서 보통의 ‘찰칵’은 처음 사진이 발명되었을 때 다게르가 주었던 노출 시간과 같은 20~30분이다. 그의 사진은 찍을 때 모든 것이 계산된다. 사진은 보통 인화할 때 많은 변화를 가져오지만, 그는 N.D.라는 필터를 이용하여 노출은 감소시키고 프린트에서는 필름 상태 그대로를 인화한다. 컬러 필름은 노출을 오래 할 경우 투명성 즉, 채도를 잃게 되기 때문에 긴 노출은 그의 사진에 독특한 느낌을 만들어 내는 요인인 동시에 그가 기술적으로 해결해 나가야 하는 문제인 것이다.

 

샘터화랑에서 열렸던 <체취>라는 제목의 전시회에서 박홍천은 1년 동안 머물던 호주의 바다와 벤치를 보여준다. 놀이동산을 찍었던 <앨리스에게>에서는 한국이라는 장소임에도 ‘낯설음’이 강하게 느껴졌는데, <체취>는 한국이 아닌 다른 장소임에도 불구하고 친밀함이 느껴진다. 이것은 아마도 <앨리스에게>에서 보여주었던 놀이동산의 인공물이라는 ‘가짜’들이 자연물이라는 ‘진짜’로 대체되면서 낯설음이 사라졌기 때문인 듯하다.

바다와 벤치의 풍경에서 관람자들은 그의 안에 내재된 장소로 오게 된다. 외롭게 보이기도 하고, 쓸쓸해 보이기도 하는 바다를 통해 작가는 자신의 마음을 담아 내고 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바다는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작가의 그리움이기도 하다. 박홍천의 ‘느린 풍경’은 긴 노출 시간 동안 미묘하게 움직인 빛과 무겁게 퇴적된 색채로 독특한 에너지를 만들어 낸다. 바다를 통해 기억이라는 긴 시간 속으로 박홍천은 우리를 이끌어 간다.

 

- 월간미술, 1997. 11.

김선정은 서울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독립큐레이터이자 한국예술종합학교의 교수이다. 1993년부터 2004년까지 아트선재센터의 수석큐레이터로 재직했으며 2005년 제 51회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커미셔너와 제 6회 서울 국제 미디어아트 비엔날레인 미디어 시티 서울 2010의 예술 총감독을 역임하였다. 최근 그는 2012 광주 비엔날레의 공동 감독으로 선정되었으며 카셀도큐멘타 13의 기획팀원으로 활동중이다.